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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경제/원자재(Commodities)

[상품지표] 원유시장

 

 

< 원유시장의 이해 >

 

국제유가의 종류

- 세계 3대 원유 시장

: Dubai유(중동 아랍에미레이트 연방국), Brent유(영국 북해지역), WTI(서부 텍사스 중질유, 미국)

 

(1) WTI(West Texas Intermediate) : 서부 텍사스산 중질유

- 텍사스주 서부와 뉴멕시코주 동남부에서 생산되는 석유

- 석유 가격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가격 형성

-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와 기타 아메리카 국가에 공급

- 이외 지역에는 수출되지 않으며 이는 차후 자원 고갈을 대비한 국가정책

- WTI는 API(미국석유협회)가 정한 비중 40도 정도의 초경질 원유(유황0.24%)

- API는 원유 비중을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한데, API가 33도 이상이면 경()질유, 30~33도는 중()질유, 33도 미만은 중()질유로 분류

- 원유는 비중이 낮고 유황 함유량이 적을수록 정제비용이 적게 들기 때문에 급유로 간주됨

- 세계 기름값의 기준은 아니지만, 미국이 원유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4 정도로 영향력이 커 주요 기준이 됨.

- 생산비가 다른 원유에 비해 높고 고품질이어서 국제시장에서 항상 가장 높은 가격, 보통 두바이유에 비해 배럴당 3~4달러, 브렌트유에 비해 배럴당 1~2달러 높은 선에서 거래됨.

- 주요 거래시장은 뉴욕상업거래소(NYMEX)

- '검은 황금'으로 일컬어지는 석유의 가장 큰 시장은 런던과 뉴욕, 싱가포르에 있음. 하지만 휘발유와 연료유 등 정제품은 전 세계 모든 곳에서 거래가 이뤄지고 있음.

- 원유는 어느 지역에서 생산된 것인지에 따라 비중과 유황 함유량에 의해 그 종류와 품질이 다양하게 나뉨.

 

(2) 영국 북해산 브렌트(Brent)유

- 스코틀랜드 동서쪽 북해의 브렌트, 티슬, 휴톤 등 9개 유전에서 생산

- 런던 국제석유거래소(IPE)에서 거래되는 원유, 유럽 원유시장의 가격기준

- 북해산 브렌트유의 판매량은 사우디아라비아에 비해 떨어지지만 전 세계에서 거래되는 전체 원유량의 2/3의 가격을 결정하는데 활용

- 브렌트유의 API비중 38도, 유황 함유량 0.36 정도의 저유황 경질유

- 유럽 지역의 산유량은 하루 630만 배럴 정도로 전 세계 원유 생산의 8~9% 차지하며 생산량의 50% 정도는 수출된다.

 

(3) 중동 두바이(Dubai)유

- 한국은 중동 두바이유를 기준 유가로 사용

- 전체 원유 수입의 70% 이상을 중동지역에서 수입하고 있는데, 그 기준가가 두바이산 유가임

- 두바이뉴는 아랍 에미리트연합(UAE)에서 생산되는 원유로 API비중 31도, 유황 함유량 2.04%의 고유황 중질유. 주로 아시아 지역으로 수출되는 중동산 원유의 가격기준이 됨

- 2.0% 이상의 유황을 함유한 원유는 '시다'는 의미로 'Sour 원유'라 함

 

※ 석유수출기구(OPEC)가 기준으로 삼는 유가는 6개 OPEC회원국 유가에 멕시코산 원유의 가격으로 바스켓을 구성해 가격을 정하고 있다. 한국 경제연구소 분석에 따르면, 유가가 배럴당 1달러 오르면 소비자물가는 0.1~0.17% 상승하고, 무역지수는 10억 달러 적자가 발생한다.

 

 

OPEC(석유수출기구)와 세계 석유값 동향

 

- 197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석유 메이저들이 세계 석유시장을 지배하면서 원유가격 결정에 막강한 힘을 가짐. 원유거래는 장기계약이 주를 이뤘고 원유가격 결정방식은 메이저가 공식판매가격을 설정하는 방식이었음. 1970년대 두 차례의 오일쇼크와 더불어 산유국의 자원 국유화 움직임 속에서 석유시장에 대한 지배력은 메이저에서 석유수출기구(OPEC)으로 넘어갔음. 이 시기에는 산유국의 정부 공식판매가격에 의한 장기계약 거래가 대부분.

 

- OPEC이 시장을 통제하던 당시에 아라비안라이트유는 가격결정의 기준이 되는 Marker 원유로서 중요한 역할을 함. 대부분의 원유 판매가격은 아라비안라이트의 가격을 기준으로 해당 원유의 물리적 트징과 수송거리에 의해 결정됨.

 

- 1980년대 전반에는 세계적인 공급과잉으로 원유의 현물시장과 선물시장이 발달하면서 가격결정의 힘이 서서히 OPEC에서 시장으로 넘어갔음. 원유가격이 약세를 보이는 상황에서 산유국들은 일정 수익을 확보하기 위해 가격인하를 통해 판매량을 늘려야 했고 산유국들의 현물거래는 늘어날 수밖에 없었음. 이에 따라 OPEC의 정부 공식판매가격은 현물시장의 가격과 무관하게 되어 의미가 쇠퇴됨.

 

- 원유 소비국 구매자들도 장기계약의 가장 중요한 이점으로 여겼던 안정적인 공급 보장도 세계적 공급과잉 상황에서는 불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현물공급을 더 선호하게 되자 산유국들은 장기계약의 경직성에 대한 구매자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새로운 거래 계약 방식을 제시. 즉, 계약기간은 1년 이상의 장기에서 1년 미만의 단기로 하고 물량은 고정되도 가격은 현물시장 가격에 연동하는 것. 1980년대 중반 이후 시작된 이러한 원유가격 결정방식은 현재까지 유지.

 

- 현물시장과 연결된 가격결정방식은 당시 시장상황에 따른 가격수준을 보다 직접적으로 거래에 반영하는 것. 즉, 특정 원유의 가격은 기준 원유의 가격에 연동되는 가격공식에 의해 산정. 이러한 공식이 정착되는 가운데 미국시장에서는 WTI, 유럽시장에서는 브렌트, 아시아시장에서는 두바이유가 Marker원유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게 됨. 이들 원유는 현물시장과 선물시장에서 유동성이 풍부했음. 즉, 소수에 의해 조작될 여지가 적어 합리적인 시장가격 형성이 가능함.

 

- WTI는 비록 미국 외 지역에 수출이 금지되어 세계적인 마커 원유로는 부적합한 측면이 있지만 현물거래와 함께 1983년부터 뉴욕상품거래소(NYMEX)에서 선물거래가 이뤄지고 있어 마커 원유로서의 기능 발휘가 가능하게 되었음. 북해산 브렌트유도 현물거래는 물론 런던의 국제석유거래소(IPE)에서 선물거래가 이뤄짐. 중동산 두바이유는 선물거래는 없고 현물로만 거래됨. WTI와 브렌트는 비중이 낮고 유황함량이 적은 경질저유황 원유여서 중질고유황인 두바이유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격이 높음.

 

- 마커 원유들이 미국, 유럽, 아시아 등 각 지역에서 거래되는 원유의 가격결정을 위한 준거가 되지만 그 품질이 거래되는 원유의 품질과 비슷할 필요는 없음. 각종 원유의 판매가격은 마커 원유의 가격에 일정액을 더하고 빼서 결정하면 되기 때문.

 

- 세계 3대 원유가 마커 원유로서 기능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님. 두바이 원유는 1990년대 들어 생산량의 급격한 감소로 현물시장의 거래 규모도 감소해 소수의 거래자들에 의한 가격조작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음. 두바이상품거래소(DME)에서 오만 원유가 선물거래를 시작하면서 앞으로 오만유가 아시아시장의 새로운 마커 원유로 부상할지 관심 집중되고 있음. 브렌트유도 생산량과 현물거래량 감소로 가격변동이 심해져 일부 산유국은 브렌트 원유의 현물가격 대신 선물가격을 기준으로 가격을 결정하고 있음.

 

- 국제 원유값은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등 중동 산유국을 중심으로 결성된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움직임에 따라 수시로 변동.

 

※ 석유위기(OIL SHOCK)

 

□ 1차 오일쇼크

-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 발발 이후 페르시아 만의 6개 산유국들이 가격 인상과 감산에 돌입, 배럴당 2.9달러였던 원유(두바이유)이 고시가격이 4달러 돌파. 1974년 1월엔 11.6달러까지 올라 2~3개월 만에 무려 4배나 폭등. 이 파동으로 74년 주요 선진국들은 두 자릿수 물가상승과 마이너스 성장이 겹치는 전형적인 스태그플레이션을 겪어야 했음.

한국의 경우 1973년 3.5%였던 물가상승률은 1974년 24.8%로 수직상승했고, 성장률은 12.3%에서 7.4%로 떨어짐. 무역수지 적자폭도 크게 확대되어 10억 달러에서 24억 달러로 증가. 1975년 성장률은 6.5%로 더 떨어졌고, 물가는 24.7%의 고공비행 이어갔음. 후폭풍은 2년간 지속되어 1976년에야 비로소 경제가 정상을 되찾게 됨. 1차 석유 파동 당시에는 1개월 만에 유가가 3.9배 오르고, 환율도 21.9% 올랐음. 1차 오일쇼크로 6%대였던 미국 국채수익률은 8%로 상승.

 

□ 2차 오일쇼크

- 1978년 12월 호메이니 주도로 회교혁명을 일으킨 이란은 전면적인 석유수출 중단에 나섰고 배럴당 13달러 대였던 유가는 20달러를 돌파. 1980년 9월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30달러 돌파.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무기화를 천명한 1981년 1월 두바이유는 39달러의 정점에 도달.

선진국들의 충격은 1차 쇼크 때보다 작았지만, 한국 경제는 대내적으로 10.26 사건과 1980년 정치혼란이 겹치면서 1980년의 실질성장률은 경제개발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2.1%)를 기록. 물가상승률은 무려 28.7%에 달했고 실업률도 5%를 넘었음. 1981년 성장률이 6%대로 높아졌지만 기술적 반등 수준이었으며 물가는 여전히 20%를 웃돌았음. 2차 오일쇼크 역시 꼬박 2년간 한국경제에 치명적 충격을 줌. 2차 오일쇼크 당시 6개월 만에 국제유가가 2.3배 올랐고, 환율은 36.5% 상승,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성장이 됨. 이때 미국 국채수익률은 15% 수준까지 올랐고 한국의 회사채 수익률도 20%초반에서 30%대까지 상승함.